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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물은 안대, 귀마개, 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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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고담]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낯선 이를 경계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는데, 나는 좀 심한 편에 속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어릴 적엔 ‘겁대가리 없다’는 말깨나 듣곤 했는데 이렇게 변한 내가 신기하기도 우습기도 하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변한 내 모습을 놀라워한다.

여하지간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내 상태가 무척이나 단단한 성벽과도 같다는 것. 그리고 내 철옹성 같은 경계심을 깨버린 사람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했고, 또 급하지 않았다는 것. 섹스를 주로 이야기하는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사이라고 해도 섹스를 가벼이 다루지도, 대화상대를 쉽게 다루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무례함과 솔직함을 구분할 줄 아는 명석함을 갖춘 동시에 호기심이나 사랑 따위의 감정으로 본인의 욕구를 포장하지도 않았다.

내가 먼저 물었나 그가 나에게 물었나, 어쩌면 조금 뻔할 수도 있는 식상한 질문이지만 서로의 섹스판타지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막은 채로 하는 섹스에 대해 한참이나 얘기를 나눴다. (두 명 모두가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열기는 가히 100분 토론을 방불케 했다.

호기심이 생겼고 그 호기심은 그동안 그가 내비쳤던 진심을 떠올리게 했다. 결정적 순간에서도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조급했던 건 외려 나였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선호하는 몸매라든지 스타일 같은 거 없어? 다 좋다니까 더 무서운데.’ 

엄밀하게 말해서 나는 ‘다 좋다’고 하지 않았다. ‘상관이 없다’고 했지. 글쎄, 섹스를 하는 데에 있어 외모가 무슨 상관일까. 아, 발기가 잘 안 되는 스타일이라면 문제가 있겠다. 그 외에는 뭐... 너무 크지 않았으면 하는 거? 어쩌다 한 번은 몰라도 큰 사람과 오래 만나면 하복부통증을 호소하곤 했다. 아무쪼록 머리카락이 없어도 괜찮고 배가 남산 만해도 상관 없다. 섹스하려 만나는데 섹스만 잘하면 되지. 못해도 솔직히 상관은 없다.

괜히 나에게 자신을 맞추려는 모습이 고마웠다. 고마웠고 그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만약에 내가 맘에 안 들면 숟가락으로 면을 펀다든지, 포크로 밥을 뜬다든지 해. 내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거나 하면.’
‘직설적으로 말하면 상처가 될까요?’ 
‘아니, 말하기 껄끄러울까봐. 편할 대로 해.’ 
‘반대로 제가 맘에 안 들면 어쩌시게요?’ 
‘글쎄,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럼 고양이 소리를 낼게.’ 

아마도 나는 그의 똘기에 이끌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뻰네나 푸실리 같은 숏파스타 먹을 때는 어떡해요? 나는 그거 숟가락으로 퍼먹는 게 좋던데’ 하는 장난은 치지 않았다. 

다행인 건지 당연한 건지 나는 식사를 하는 동안 면은 포크로, 밥은 숟가락으로. 식기를 제대로 사용했고 그의 입에서도 고양이소리는 나지 않았다. 

"입 작다더니 진짜였네" 
"컴플렉스예요. 입술은 그래도 현대의학의 힘을 빌리면 되는데 아구는 뭔 짓을 해도 안 벌어지더라"
"왜 난 좋은데"
"왜요? 난 좋은지 모르겠는데"
"힘들어하는 모습 보는 게 좋거든"

으음. 무슨 말을 할 지 잠시 보류해야 했다. 회전하는 두뇌의 속도만큼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일어나자. 힘들어하러 가야지."

두툼한 손을 얼굴 앞으로 들이미는 그였다. 이런 에스코트가 오글거린다고 생각해서 평소에는 한사코 거절해왔지만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니 조금 색다른 기분에 입꼬리가 오르락했다. 그의 손 뒤에 보이는 불룩해진 바지 섶 때문에 웃은 것도 조금은 있었다. 

이동하는 길에 기억에 남는 글에 대해서 얘기했다. 조금 남은 어색함을 녹이려는 의도로 꺼낸 말이 맞다. 아직도 어색하냔 질문에 아니라고 거짓으로 답해서 미안. 누가 들어올지 모를 방 안에서 홀라당 벗고 스스로 안대를 착용하고 열어둔 문 앞에 엎드린 채로 기다리는 행위는 나에게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그 용감함에 부러움과 일말의 경외심 같은 걸 느낀다고 내가 그랬다. (진심으로 글을 읽으면서 박수를 치고 싶었다. 상황에, 필력에.) 또 오글거리는데, 가만히 얘기를 듣던 그가 자기 만나러 용기 내줘서 고맙다고 손등에 짧게 키스를 했다. 정전기였는지 이유 모를 전율이 찌릿했다. 

세이프워드safe word와 세이프시그널safe signal을 미리 정하는 섬세함이란. 물론 말을 못 하게 될 테니 세이프워드를 쓸 일은 없겠지만. 

차례로 안대, 귀마개, 재갈을 착용시켰다. 안 떨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턱이 달달달 떨려서 자꾸 재갈에 갈갈거리며 소리를 냈다. 되짚어보니 그 상황이 엄청 웃긴데, 당시에는 웃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안대를 써 본 사람을 알겠지만, 완전하게 밀착되지 않고 얼굴의 굴곡에 따라 조금은 뜨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나 콧대가 높은 사람이라면 눈을 아래로 한껏 내리깔면 대강의 실루엣은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일회용마스크처럼 와이어가 들어있는 안대라면 얘기가 달라질지도.

나는 약아빠진 인간이라 눈가리개를 했어도 내 앞의 광경이 궁금했다. 눈을 내리깔고 그의 모습을 꼴깍거리며 혹은 덜덜거리며 훔쳐봤다. 그의 발이 보였고 내 무릎이 보였다. 그 위에 얹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보였다. 그 이상의 시야는 차단되어있었다. 혀가 뭉개져있으니 침 삼키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물 마시는 것도 아닌데 연하음이 꽤 크게 들렸다. 뭉툭한 손이 올라가나 싶더니, 내 옆통수를 사락사락 쓰다듬었다. 귀마개 한 쪽을 빼며 그가 속삭이기를,

“침 삼키지 말고 그대로 흘려.” 

그 때부터 였을까,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면서 종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면서 뜨겁고 걸쭉한 침이 주륵주륵 흘렀다. 어버버. 말도 못 하는 주제에 나는 자꾸 무어라고 외쳐댔던 것 같다.

꿇어앉은 다리가 저려올 때 쯤, 조금은 서늘한 몸이 나를 살포시 안아올렸다. 서늘하면서 무서웠고 또 포근하면서도 두려웠다. 시각과 청각을 차단하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고들 한다. 그 날따라 나는 온도를 퍽 예민하게 느꼈다. 예민하게 느낀 것은 온각과 냉각 뿐만이 아니었다.

서늘한 그의 몸이 멀어지는 걸 느끼고 나니 나는 차렷을 하고 서있었다. 올바르게 서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평형감각도 둔감해진 느낌이었고, 나는 조금 휘청였던 것 같다. 휘청거리는 사람을 앞에 두고 뺨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는 그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물론 턱이 돌아갈 정도로 심하게 때린 것은 아니고, 정말 가볍게 툭툭. 마치 잘 부탁한다는 듯한 인사 같은 스킨십에도 나는 옴찔거렸다.

페더터치에 대한 얘기는 없었는데 마치 깃털 같은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내 목을 기점으로 아래로 아래로 훑어내려갔다. 쇄골, 겨드랑이, 유방, 젖꼭지를 피해 갈비뼈, 갈비뼈에서 그것이 깃털이 아니라 손가락임을 인지했다. 손가락은 배꼽으로 빠지는가 했는데, 우회해서 아랫배를 간질였다. 나도 모르게 꽉 쥔 주먹을 그가 펴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는 땀이 배어있었고, 손톱을 짧게 정돈하고 왔음에도 손바닥에 새겨진 날카로운 초승달자국이 아렸다.

그는 나를 점점 뒤로 몰아세우더니 어깨를 밀쳤다. 찰나의 순간, 정신이 아찔했는데 푹신한 침대에 뒤통수가 닿자마자 안도의 한숨인지 흥분의 표현인지를 콧김으로써 내뿜었다. 누워서 침을 흘려대니 목덜미고 어깨고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짧고 빠른 호흡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무엇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발등으로부터 뱀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귀가 막혀있으니 내가 내는 목소리가 두개골 안에 갇혀 울려댔다.

내가 내는 신음이 부끄러워 참으려고도 해봤는데 참을성이 없는 탓인지, 그가 옆구리를 스쳐지나갈 때 한 번, 유두를 깨물 때 더 크게 한 번 소리를 내질렀다. 머리가 댕댕 울렸다. 이렇게나 고함을 질러대는데 혹여라도 신고를 받은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재갈이 입을 막은 터라 한 음절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짐승 같은 울부짖음만 계속됐다.

그의 목소리가 온전히 귀에 들어오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뭐라고 하는지 궁금해서 하마터면 귀마개를 빼버릴 뻔했다.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손이라 그런지 자꾸 멋대로 행동하는 스스로가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인지 이두인지를 몇 번 탭하다가 그냥 와락 껴안아버렸다. 제멋대로 구는 내 모습이 그에게 마냥 귀여운 모습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흘린 침으로 이미 지저분해진 목덜미와 쇄골 부근을 지나, 그는 이제 내 귓볼을 잘근잘근 씹었다. 귀마개가 바작바작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단단하고 묵직한 게 가랑이를 자꾸 건드렸다. 완벽하게 계산된 듯, 삽입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까지만 간들간들. 그를 와락 껴안은 것은 이제 두 팔 뿐만이 아니다. 다리까지. 한 데 엉켜 넣으려는 자와 넣지 않으려는 자만 있었다.


글쓴이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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